아름다운 것이란 본디 위로 향한다. 그것이 아무리 기형일지라도. 그것이 순리. 시대에 따라 가장 취득하기 어려운 것이 조형으로서의 미美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체형, 이목구비, 뼈의 모양, 그 무엇이든. 사람이 굶어 죽어 나가는 시대에는 잔뜩 살을 찌운 자가 미인이었듯이. 고귀한 것은 으레 그렇다. 애초에 거머쥐기 어려워야 한다. 그 많은 예법과 허례허식...
# 01. 상담실치료자와 내담자, 진갈색의 테이블을 두고 마주보고 앉아 있다. 전구의 빛이 둥그렇게 떨어진다. 희다기보다는 조금 연하고 노란 조명. 상담실의 벽면은 미백색이고, 커다란 그림이 마치 쏟아질 듯 걸려있다. 강처럼 추측되는 물가와, 가라앉은 여자와, 우거진 풀과, 가지와, 해초와, 물에 젖어 떠있는 화려한 드레스자락과, 죽은 여자를 맴도는 물 위...
강한 척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인간이라는 자각이 들 때가 있었다. 차라리 거울처럼 깨질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영혼에는 자국만 남는다. 일시적으로 보이지 않게 치워둔 책임이나 과거는 늪 같다. 지금은 발목 아래 있지만, 종국에는 같이 바닥 아래로 잠겨 마주하게 될 무언가. 사는 내내 자신을 좇을 그 무언가를 보는 것에는 늘 불쾌함 이상의 무력감이...
오늘 수술은 특히나 험난했다. 환자는 예기치 못하게 라텍스 알레르기로 인해 심박수가 증가했고, 조수가 중간에 쓰러지기까지 했다. 예정에 없는 일들이 줄줄이 일어나자 웬만큼 수술실에 들락인 의사와 간호사들까지 패닉했다. 하나씩 일어났더라면 좋았을 일들은 한꺼번에 일어날 때 사람들을 망친다. 대학병원의 스케줄은 사람을 배려해주지 않기로 유명하다. 기본적으로 사...
* 동영상 재생 후 우클릭 > 루프 혹은 연속 재생. “쇼지 씨.” “응?” “여자가 향수 선물을 한다는 건 뭘까요?” 뜬금없는 질문에 현미경을 들여다보던 쇼지가 휙 돌아보았다. 쿠베는 아까부터 나카도에게 떠맡은 파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노트북을 잠시 닫았다. 머리로 뭐가 들어오려다가도 튕겨나가는 것 같았다. 쇼지는 흥미롭다는 듯 웃음기가 잔뜩 ...
* 트친분 드림주 언급이 아주아주 짤막하게 나옵니다 ~~ * 동영상 우클릭 > 연속 재생 혹은 루프. 친구들에게 하나씩 문자를 돌렸다. 고등학생 때의 친구들이다. 똑같이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하는 말 뿐이었는데 각각 다른 말들이 돌아왔다. 잘 지냈어, 너는 어떻게 지내? 하는 친구는 내가 아는 애 중 최고의 모범생이다. 네가 없어서 꼭 굶고 사는 ...
비가 마치 날리듯이 왔다. 분명 퇴근하고 나서 나란히 우산 두 개를 쓰고 걸을 때까지는 이러지 않았다. 처음에는 비만 더 심하게 오더라 싶더니, 바람이 심해져서 나중에는 아예 발목까지 휘청휘청댔다. 근처의 음식점으로 가서 고기를 구워먹자고 약속했는데, 갈수록 약속이고 뭐고 달리느라 정신 없었다. 옷이 다 젖은 건 물론이고, 우산 살이 다 휘거나 꺾여버려서 ...
UDI와의 연계가 제안된 것은 꽤 오래 전 일이었다. 부검의들의 정신건강을 케어하기 위한 시스템으로서 심리상담. 다만 이것이 제안된 것은 UDI가 아직 국가의 내각 프로젝트였을 시기이기 때문에, 이제 와 다시 시행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도 시행이 가능했던 배경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보조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러나 주...
어쩌면 모든 두통은 기억을 질료로 발화하는 것이 아닐까. 파고 드는 통증에는 몇 가지가 섞여 있었다. 과음으로 인한 알코올, 휘발성이었다면 좋았을 부끄러운 기억,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일부분들에 대한 불안까지. 점심은 걸렀다. 뭐가 들어갈 성 싶지 않았다. 나는 어제 네일을 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형형색색의 스톤과 베이스로 칠해지는 단정한 ...
* 작중 5화를 기반으로 쓴 글이므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유의해주세요! * 경찰서 안은 혼잡했다. 여러 사람들이 엉켜 사정청취니 인적조사니 하는 절차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내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그 울렁거리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급하게 뛰쳐나온 탓에 겉옷이 충분히 두껍지 않아, 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온몸이 떨렸다. 나는 금세 흩어지는 호흡을 ...
정해진 것처럼 의대에 몸을 담그고, 어쩔 수 없이 몰려오는 상념들과 반 년 정도를 고전하다 결국 휴학계를 제출했다. 법의학과가 잘 맞지 않는 건 아니다.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순전히 오기라고밖에 답할 수 없다. 안전선이 있는 자만이 부릴 수 있는 오기. 미루다가도 복귀하면 최선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나와의 연을 완전히 저버릴 수도 없으며, 여차해서 원하...
* BGM과 함께 읽어주세요. 동영상 재생 > 우클릭 > 연속 재생 혹은 루프.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때아닌 소나기가 귓전을 때렸다. 다른 나라에서 부는 것처럼 빨라서 공명하는 창문하며, 타닥타닥거리며 유리에 달라붙어 오는 빗줄기 하며, 딱 봐도 험한 날씨였다. 워낙에 깜빡깜빡해서 일기예보를 잘 챙겨보지 않았다. 이런 일은 늘 있었다. 특히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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